▲[자료사진] 지난 남아공월드컵 때, 베이징 한국아이들이 경기에 앞서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슴을 손을 얹고 애국가를 따라 부르고 있다.
우선 용어부터 정리하고 넘어가자. 통상 우리끼리 ‘교민’이니 ‘교민사회’니 하지만 영주권 제도가 없는 중국에서는 그다지 정확한 단어라 할 수 없다. 상대국이 ‘교민’이라 불러주지 않으려는데 우리가 굳이 교민입네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유엔은 1년 이상 장기거주를 기준으로 한 ‘이민’ 규정을 가지고 있지만, 수시로 또는 정기적으로 한국에 들락날락하는 우리가 이민자일 수는 더욱 없다. 우리와 조상을 같이 하지만 중국 국적자인 조선족의 존재가 있으니 그들을 ‘교포’라 부르며 구분하기 위한 용어로만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여기서는 무난하게 ‘장기 거주자’란 용어를 채택하기로 한다.
이곳에 장기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어려움을 요약해 보라면 제각기 다른 사업상의 문제 외에는 단연 의료와 자녀교육 문제가 공통적으로 꼽힐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야말로 현지 정부가 그토록 애써 마지 않는 투자유치에 큰 걸림돌인 동시에 현지 사회환경 및 사회발전단계와도 맞물려 있기에 당장 획기적인 변화를 꾀하기도 어려운 난제일 것이다.
의료의 경우 의료전문용어를 사이에 둔 언어소통의 어려움이나 건강보험 유무 이전에 우선 의료현장이 한 마디로 갑갑하다. 믿을 만한 의료시설과 의료진을 갖춘 곳이 극히 적기 때문에 가벼운 증상이나 부상 외에는 1차 진료만 한 후 귀국을 서두르는 게 일반적이다. 게다가 폭리 등 현지인 사회에서조차 문제되고 있는 운영시스템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며 당하기 일쑤이다. 가벼운 감기 증상에 다 먹지도 못할 분량의 많은 약을 안기는 것쯤은 다반사이다. 물론 병원 매출을 위해서일 것이다. 가뜩이나 아픈 것도 서러운데 마음까지 상하게 하니 참으로 고약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님 손등에 묘한 형상의 종양이 생겼다. 몇 군데 그런대로 괜찮다고 하는 곳들을 전전해 보았지만 하나같이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진료 소견과 함께 입원치료를 권유받았다. 하지만 귀국해서 진료를 받아 보니 별 것 아닌 것이었고, 지금까지 아무 탈없이 잘 지내고 계시다. 칠순 노인이신지라 불안해서 그 이후 아예 귀국시켰다. 또 언젠가 큰애가 하복부의 고통을 호소하길래 들쳐 업고 가 일주일을 링겔을 맞혔지만 효과가 썩 시원치 않았다. 마찬가지로 귀국해서 진료를 받아 보니 하루만에 간단히 나았다. 아이에게 괜한 생고생을 시킨 아비 마음이 영 편치 않았었다. 일전에 내 귀에 아무래도 중이염이 생긴 것 같아서 가까운 곳 중 가장 큰 병원을 찾았더니 이비인후과가 있긴 있는데 전문의는 아니니 그리 알고 받든지 말든지 하란다. 딴엔 큰 병원인데 싶어 수속을 하고 가 보니 귓속을 비추는 전용 플래시도 없었다. 마이너 파트 진료는 이처럼 제대로 갖춘 곳을 찾기조차 힘들다.
선양 시내 모 특정 병원에 매우 훌륭한 입원시설이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건 현지인 중에서도 특정계층만이 이용할 수 있을 뿐 우리같은 외국인들이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 병원에서 외국인 전용 진료창구를 만들었다기에 내가 하고 있는 일과도 관계있는지라 귀가 번쩍 틔어 달려가 확인해 봤더니 통역시스템도 구비되지 않은 데다가 하루 전 예약시스템이어서 만성환자나 고려해 볼만한 수준이었다. 내 눈엔 그저 홍보용이었다.
교육문제도 결코 만만치 않다. 한족 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둘째 아이에게 물은 적이 있다. 중국 친구들도 좀 사귀고 그러지 왜 아빠 보기에 맨날 그리 겉도느냐고. 녀석의 중학교 시절이니 꽤 오래 전 이야기다. 똑같이 한족 학교를 다녔지만 성격이 진득한 큰애와는 달리 둘째는 중국 아이들과는 철저히 따로 놀았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특별히 내가 알 만한 그의 또래 한국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던데다 어차피 한족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아이의 교우관계와 사회성을 고려해 짐짓 툭 던져본 말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왜 학교 생활을 그리 삭막하게 보내고 있는지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학부모회의에 몇 번 참석하며 분위기를 파악해 보니 금방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중국 학교는 분위기부터가 전반적으로 매우 권위적이다. 어린 학생의 섣부른 “그건 어째서 그런가요?”, “그걸 왜 꼭 그리 해야만 하나요?” 하는 식의 분방한 질문이 용납될 분위기가 아니다. 마치 한 세대 전 60~70년대 우리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일제의 황국신민 교육을 연상시키는 그 아이템들이 중국의 일체식, 주입식 이데올로기로 대체되어 있을 뿐이다. 교실마다 태극기와 함께 교훈과 급훈이 액자에 걸려 있었던, 그리고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고 낭독해야만 했던 그런 분위기가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 하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란 한국 아이들은 뼛속 깊이 엄습하는 갑갑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외국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힘든 건 당연한 일이지만 커리큘럼 소화도 쉽지 않다. 어문이나 수학 등 기본과목은 그렇다치더라도 장차 사회인으로서 쌓아야 할 교양의 기초인 사회과목은 한국학생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정치’라는 이름의 과목으로 대체되어 있고, 정서교육의 기본인 음악도 교재가 오음보로 되어 있으니 까막눈이 따로 없다. 한 마디로 한국학생들에게는 숨막히는 커리큘럼 내용이다. 어느 곳 하나 쉬어갈 데 없는 수업을 온종일 받고 나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서 자기도 모르게 엉뚱한 돌파구를 찾기 십상이다.
교우관계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구내식당 이용의 어려움이나 문화적 차이는 관두고라도 사회발전단계와 평균 생활수준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보니 언어소통이 순조롭다 한들 또래 중국학생들과 공통적인 대화의 소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이제 막 컴퓨터통신에 눈 뜬 IT 1세대적 컨텐츠에 재미있어 하는 중국학생들에게 성의껏 눈높이를 맞춰 주려는 한국학생들은 거의 없다. 있다면 분명 초등학교 시절부터 중국학생들과 똑같이 자라난 경우일 것이다.
잠시 관련된 이야기 하나. 20대 초반의 나이 어린 중국인 직원이 자기 눈높이로 묻는다. 한국사람 여럿이 모여 있을 때 즐겨 하는 놀이로 어떤 것들이 있느냐고. 한국을 동경하고 한국인과 한국어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그의 질문에 즉각 속시원히 답변해 주기는 매우 힘들었다. 그가 알고 싶어하는 것에 맞춰 이야기해 주기엔 한국사회가 너무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비롯 자치기, 땅 따먹기, 고무줄 놀이, 소타기와 말타기 등 별도의 금전 지출 없이도 재미있게 잘 놀 수 있었던 ‘그때 그 시절’ 얘기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 해서 현재의 모습을 시시콜콜하게 설명하자니 쓸데없이 위화감만 조성할 것 같아서 난감했던 적이 있다. 3,600달러와 2만 달러의 생활상의 차이는 그렇게 큰 것이었다.
어쨌든 아이의 학교생활 현황을 파악한 난 과감하게 그의 일상에 수정을 가했다. 녀석의 고충을 그대로 두었다간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기본과목 외에는 수업시간에 잠을 자든 말든 다른 학생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음대로 해도 좋다. 대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과목을 별도 과외프로그램으로 짜 줄 터이니 학교가 파한 후 집에서 충실히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주말에는 공부같은 건 집어치우고 마음껏 뛰놀아라. 대충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교양을 포함한 가정교육을 대폭 강화했다.
하지만 녀석은 한 번 폭발했다. 아이가 사고를 쳤다며 학교 덕육처(德育處)에서 연락이 왔다. 가 보니 2층 복도의 대형 유리창을 박살냈는데, 마침 1층에 지나다닌 다른 학생들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뻔 한 일이었다. 변상과 함께 각서를 쓰고 아이를 데리고 나오며 물었다. “왜 그랬니?”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 있다가 얘기했다. “네가 그래야만 해서 그런 일이었다면 학교의 유리창을 모두 다 박살내도 좋다. 아빠가 책임지마. 한데 그래야만 해서 그런 일이 아니었다면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다행히 그 이후 아이는 아무 탈없이 무사히 그 학교를 졸업했고, 지금은 성년에 진입했다.
약 10년 가까이 이곳에서 살아 오는 동안 특히 갑갑했던 두 분야를 들어 보았다. 물론 생활상의 어려움만의 이야기니 사업으로 범위를 뻗으면 이야기의 전개는 차원을 달리한다. 어쨌든 두 분야 공히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획기적이라 불리기에는 변화의 속도가 너무 더뎌서 아직 믿고 의탁할 만한 수준은 결코 아니다. 어쩔 거나. 아쉬운 자리에 필요한 것들이 생긴다고 근래에 들어서는 의료면 의료, 교육이면 교육, 여러 가지 대안들도 생겼다. 적어도 근래에 진출하시는 후진, 그리고 앞으로 진출하실 분들은 내가 겪었던 이 분야의 어려움이 상당 부분 경감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선양세무외국어학원 원장 박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