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용
경북대학교 중문학과 졸업(1988)현대자동차 판매영업부 근무 (10년)
재중국 한국인회(북경) 사무국장 역임
중국 중앙재경대학 금융학과 석사
現북경 건홍투자자문 이사 (kanhmc@hanmail.net)
그 날은 북경 인근의 랑방(廊坊)이라는 곳에서 국제 경제무역 교류회가 열려서 가던 날이다.그 전날부터 끝내야 할 과제가 완성되질 않아 집에서 점심 때가 지나서야 겨우 마무리를 하고 식사도 거른 채 사무실을 향해 출발하였다. 집에서 사무실을 가려면 버스를 한번 타고 내려 지하철을 타야 한다. 그런데 버스를 내려 지하철을 타려고 막 길을 건너려는 순간 느닷없이 자전거 한대가 들이닥쳐 피할 사이 없이 나는 양복을 입은 채 아스팔트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왼쪽 역방향에서 오는 자전거에 부닥치는 순간 왼쪽에 가방을 들고 있어서 오른 쪽 손으로 땅바닥을 집고 엉덩방아를 그대로 찌었다. 엉겁결에 가방을 들고 다시 일어났는데 자전거 주인 아줌마는 역방향에서 온 자신의 행동은 돌아볼 생각도 않고“나를 보지도 못하냐?”고 한마디 내뱉고는 자전거를 타고 줄행랑을 쳐버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 여자의 행동이 참으로 어이없고 뻔뻔스럽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 뺑소니 아줌마는 양복 입은 사람을 그것도 역주행으로 오다 넘어뜨렸으니 다쳤으면 돈이라도 물게 되고 잘못이 자기 탓이 될 것 같아 줄행랑을 친 것 같다. 참으로 황당하고 바보 가 된 기분이었다. 그 낭패감과 속상함 이란… 차라리 욕이라도 실컷 해주고 싶었지만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중국어로 된 욕이 생각이 났어야지!!!!
그런데 교류회의 마지막 날은 더 어처구니 없고 기분 나쁜 일을 또 당하였다. 당일 주최측에서 마련한 가구단지 견학이 있어 한국에서 온 손님들과 단지 견학을 하다가 맨홀에 빠져 왼쪽 팔꿈치 찰과상을 입고 오른쪽 다리 타박상을 입었다. 한국 손님이 견학하는 단지 명칭을 묻기에 마침 입간판에 지명이 적혀 있어 그것을 가리키며 설명해 주는 순간 바로 내 앞에 있는 맨홀에 뚜껑이 없을 줄이야! 한국이라면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었겠지만 환한 대낮에 멀쩡한 정신으로 사람이 맨홀에 빠졌으니, 내가 빠진 맨홀은 허리까지 왔지만 혹시나 어린아이가 빠졌다면 어찌됐을까 상상하니 기가 막힌다.
이렇게 큰 행사장에 뚜껑 없는 맨홀에 아무런 경고표시나 주의표시가 없었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행이 바닥이 깊지 않아 얼른 나왔는데 왼쪽 팔꿈치에 피가 났고 오른쪽 다리가 걷기에 무척 불편하였다. 결국 병원의 간호사를 불러 응급조치를 간단히 받았지만 낭패감과 속상한 마음은 영 가시지를 않았다. 다행이라면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만일 행사에 참석한 손님이 빠져 큰 사고가 났다면 주최측에서 보상이나 해줄런지….
그러고 보니 맨홀뚜껑으로 인한 사고가 전에도 한번 있었다. 중국생활 초기에 한국의 지인과 자전거를 타고 만리장성을 갔다 오다가 갑자기 흙바람이 불어와 눈을 감았는데 하필 그 순간 진행방향에 맨홀이 뚜껑이 없어서 타고 있던 자전거 앞 바퀴가 빠지면서 그대로 굴러 떨어졌었다. 그 때도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한 달을 넘게 고생을 하였다. 큰 딸아이가 중국에서 5년을 공부하고 중국에서 죽어도 대학을 안 가겠다고 하였을 때 그래도 나는 중국이라는 나라와 중국인들의 좋은 점을 열심히 설명하며 중국에 남을 것을 설득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딸 아이는 내 의사와는 달리 한국을 선택하였다. 이번 주에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새삼 그 놈의 심정을 좀 이해할 것도 같다.
3일간의 출장을 끝내고 베이징으로 돌아와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전철을 탔다. 전철 안은 늘 사람들로 붐비고 빈자리가 없다. 사고로 기분도 다운되고 짐도 무거워 나는 인상을 꾸긴 채 자료로 받은 종이가방은 한 손에 들고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손가방은 바닥에 놓을 수 없어 무릎을 사용해 문 옆 의자 턱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만큼 시간이 지났을까 옆에 앉은 중년이상의 머리가 허연 남자가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앉으란다. 얼핏보니 나이가 나보다 분명 더 들어 보이고 다음 역에서 하차할 폼도 아니었다. 분명 그 날 내 모습이 무척 피곤하고 짐이 많아 일부러 자리를 내주려 한 것 같다.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주위사람들도 내가 앉지 않으면 그의 성의가 없어지니 무조건 앉으라고 해서 결국 나는 앉았다.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은 노약자와 임신부들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자리를 양보하거나 짐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전혀 모르는 선한 사람으로부터 처음으로 자리 양보를 받았다.
잠시 눈을 감고 지난 삼일 겪었던 일들을 떠올려본다. 뻔뻔스럽게 느껴졌던 자전거아줌마, 맨홀에 빠져서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팔꿈치며 다리통증 그리고 나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준 나보다 주름과 흰머리가 더 많은 남자……
전철을 내려 지난 번 자전거사고가 났던 건너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 때 친구가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린다는 연락이 왔다. 택시를 타고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에 빈 택시를 찾기 위해 두리 번 거리는 내 눈에 어떤 사람이 버스에서 내려 흰 지팡이로 바닥 여기저기를 탁탁 치는 것이 보였다. 그는 눈먼 장님이었다. 그는 아무나 들으라고 자기는 몇 번 버스를 타고 가니 그 버스가 오면 가르쳐 달란다. 참으로 기특하고 용감스러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앞이 보이지도 않은 사람이 어찌 혼자 버스를 타고 다닐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주위를 둘러 보니 사람들은 별로 그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문득 내가 사고를 당하고 보니 이 눈먼 사람이 걱정이 되었다. 멀쩡한 두 눈을 가진 나도 최근에 연속 두 의 사고를 당하였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 이 사람은 얼마나 더 위험한 순간들이 많을까 싶었다.
집 앞에서 기다리는 친구에게는 상황을 설명하면 이해해주리라 생각하고 그가 말한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간을 기다리자 그가 말한 버스가 왔다. 버스가 왔음을 알려주자 그는 버스출입문을 찾지 못해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간다. 눈이 안보이니 그럴 수 밖에. 손으로 그의 팔을 끌어 타는 문으로 인도하고 같이 타는 중국인에게 잘 살펴보라고 부탁을 하고 나는 택시를 탔다. 지난 한 주간은 참으로 내게 많은 일이 일어나고 길었다. 사고로 화가 나고 황당했던 일들,처음으로 자리를 양보해준 그 남자, 그 중심에는 버스정류장에서 만났던 장님과의 인연이 가장 큰 비중으로 자리하고 있었다.